2013-04-25
꺼진 컴퓨터에 연결된 스피커를 켜면 어떤 나즈막한 소리가 들린다. 지이이잉. 이라고 해야할까.
난 줄곧 이 소리를 싫어했다. 잘 땐 저런 잡음이 듣기 싫어서 항상 스피커를 끄고, 귀마개까지 하고서 잠들었다.
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이 소리가 ‘재미있다’고 생각했다.
날이 갈 수록 내가 싫어하던,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.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쳐다보게 된다.
[모든 것을 다 알고 싶다. 그래도, 아무튼 모든 것의 이야기를 다 들어보고 싶다.]는 생각이 날 이렇게 바꿔가고 있는 것일까?
기독교 성경에 ‘네 마음과 힘을 다해 주를 사랑하라.’는 구절이 있다. 뒤에 알고보니 칼 세이건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지만, 항상 책을 붙잡고 있던 내가 가진 가장 큰 힘은 ‘아는 것’ 이었다. 그냥 아는 것. 그 까지가 내 능력이었다.
정말로 어려서 들은 신과 예수를 사랑했기에, 더욱 더 그를 알려고 했다. 그것이 내가 신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. 그리고 그 끝에 신이라는 개념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, 어떤 고통을 지난 뒤에, 신앙을 잃었다.
하지만 그 뒤에 온 정리된 편안함과 행복은 ‘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걸.’이란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. 난 정말로, 신이라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, 그 캐릭터로서, 개념으로서 사랑하게 되었다.
그 애정은 신화가 아니라, 다른 이야기로 향하게 되었다. 픽션 뿐 만 아니라, 나 자신의 이야기,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의 이야기.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알고 싶어졌다. 그 이야기를 되세기는 것은, 내가 그것을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가 되었다.
이 전후로, <라플라스의 괴물>에 대한 글을 읽었었다. 물리학자 라플라스가 제안한, 뉴턴의 기계론에 입각한 ‘모든 것을 아는 괴물.’ 모든 것을 다 알기에, 앞으로 일어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괴물.
세상 모든 것의 현재 상태를 알고 있고, 그것들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가에 대한 법칙에 통달하여서 모든 것을 예언할 수 있고, 그것은 언제나 옳은 괴물.
처음 그것을 읽었을 땐 그것을 멋지다고 생각했다. 하지만 그것은, 현대 물리학에서 하이젠베르크의 이론에 의해 박살난다. 그것은 불가능했다.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, 모든 법칙을 다 안다고 해도 확실한 예언은 불가능하다.
결국 모든 것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.
그렇지만 [가능하다]와 [하고 싶다]는 반드시 공존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. 난 결국 아직도 <라플라스의 괴물>을 버리지 못 했다. 그 지식은 지금 존재하는 부조리함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, 란 욕심과 함께.
난 라플라스는 커녕 플라톤에서도 벗어나지 못 한 것인지도 모르지.
‘알지도 못하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?’라는 질문에 난 여전히 대답하지 못한다.
그것은 이해를 말한 것은 아니니까.
알지 못 하지만 완전히 사랑한다, 고 하는 것은 무엇을 사랑했다는 것일까. 난 여전히 그것을 대답하지 못한다.
다만 내가 아는 부분 만큼은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. 이것도 그것도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.
때론 더 많은 것을 사랑하고 싶어서 더 알고 싶다고 생각한다.
결국 신앙을 버리겠다고 결정했던 시기에 고민들이 이런 것들을 포함하고 있었다.
아무튼, 난 이제 잡음을 즐기고,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.
어떤 굉장함에 대한 환상,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함을 버리면 그제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고 했다. 어쩌면, 그것이 이런 것들을 말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.